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혜경궁 홍씨 (문단 편집) === [[임오화변]] === 세자빈 홍씨는 사도세자가 [[임오화변|대처분]]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는 안절부절하다 오후 3시에 [[창경궁]] 밧소주방의 [[뒤주]]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 [[칼]]로 2차례나 [[자결]]하려 했으나 주위에서 [[칼]]을 빼앗아 실패했다. 세자빈 홍씨는 [[사도세자]]를 만나기 위해서 달려갔으나 들어가지는 못하고 [[사도세자]]가 울부짖는 [[소리]]만 들으면서 "그리 [[힘]]도 세신 분이 어째서 [[뒤주]]에 들어가란다고 그냥 들어가셨다는 말인가?"하고 [[사도세자|남편]]을 원망 아닌 원망을 하며 울었다.[* [[사도세자]]가 [[영조]]에게 애원하는 소리를 들으니 간장(肝腸, 간과 창자)이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앞이 막막했다고 《[[한중록]]》에 기록했다.] 이후 세자빈 홍씨는 [[내시]]를 시켜서 영조에게 "[[죄인]]의 아내가 어찌 [[궁]]에 있겠습니까"하고 친정으로 갈 것을 허락해달라는 [[편지]]를 보내면서 [[정조(조선)|세손]]을 지켜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고 잠시 후에 세자빈의 오빠 홍낙인이 [[혜경궁 홍씨|세자빈]]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면서 “[[사도세자|동궁]]을 [[폐위]]하여 [[폐서인|서인]](庶人)으로 만드셨다 하니 [[세자빈|빈궁]]도 더이상 대궐에 있지 못할 것이라. [[영조|주상]]께서 [[풍산 홍씨|본가]]로 나가라 하시니 [[가마(탈것)|가마]]가 들어오면 나가시고 [[정조(조선)|세손]]은 남여(藍輿)[* 지붕이 없는 작은 가마.]를 들여오라 하였으니 그것을 타고 나가시리이다."라고 했고 세자빈 홍씨도 통곡했다. [[영조]]는 [[사도세자]]가 죽은 당일에 세자빈 홍씨에게 '혜빈(惠嬪)'이라는 빈호(嬪號)를 내린다.[* [[순빈 봉씨]] 이후로 [[조선]]의 [[세자빈]]들은 별도의 빈호를 쓰지 않았지만 남편인 [[왕세자|세자]]가 죽은 경우에는 빈호를 썼다. [[인수대비]]도 남편 [[의경세자]]가 죽자 '수빈(粹嬪)'이 되었고 혜경궁 홍씨의 손윗동서인 [[효순왕후]]도 남편 [[효장세자]] 사후에는 '현빈(賢嬪)'으로 불렸다.] [[영조]]의 명으로 [[풍산 홍씨|친정]]으로 나가 있다가 다시 [[창경궁|궁]]으로 돌아온 혜빈은 [[정조(조선)|아들]]을 잘 키워 훌륭한 [[조선/왕사|임금]]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유일한 희망 밖에 없었을 것이다. 친정아버지 [[홍봉한]]이 [[사도세자]]의 [[죽음]]과 관련해 [[영조]]에게 직접 바친 [[상소|상소문]]에서 혜빈 홍씨는 [[왕세손]] [[정조(조선)|정조]]에게 "나는 아내로서 [[임오화변|이런 경우]]를 당하고 [[정조(조선)|너]]는 자식으로 이런 경우를 만났으니 다만 스스로 [[운명]]을 슬퍼할 뿐이다. 장차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허물하겠느냐? 또 나와 네가 지금까지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[[영조|성상]](聖上) 덕분이며 우러러 의지하고 목숨을 맡길 분도 오직 [[영조|성상]] 뿐이다."라고 하며 성은(聖恩, 성스러운 은혜)에 보답해야 말했다고 한다. 물론 [[영조]]는 후회하지 않았고 "자신이 [[종묘|종]][[사직|사]](宗社)를 위해 의(義)로써 결단한 것"이라고 [[홍봉한]]에게 말했다. [[영조]] 자신도 [[홍봉한]]이 상소문을 바치기 전에 이미 직접 혜빈을 찾아가 보았는데 "저희 모자가 살아있는건 다 [[영조|성상]]의 은혜 덕분입니다"라고 [[영조]]의 [[임오화변|처분]]을 긍정하는 뜻을 보이자 그녀가 효성스러웠다고 칭찬했다. 한편 혜빈 홍씨는 [[영조]]에게 [[정조(조선)|세손]]이 [[경희궁]]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. 당시 혜빈은 [[창덕궁]]에 있었으므로 자식과 생이별을 하는 셈이었지만 남편 [[사도세자]]가 죄인으로 몰려 죽은 상황에서 아들 [[정조(조선)|세손]]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는데 당시 [[정조(조선)|세손]]은 9세였다.[* 이후 [[정조(조선)|정조]]는 [[조선/왕사|국왕]]으로 즉위하는 [[1776년]](영조 52년)까지 생(生)조모인 [[영빈 이씨]]의 처소 부근인 [[경희궁]]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.] 한 번은 [[정조(조선)|어린 세손]]이 혜빈에게 와서는 울면서 떨어지지 않자 [[영조]]가 "이렇게 어미를 그리워하니 놔두고 가는게 좋지 않겠느냐."고 말하자 "여기 있으면 [[영조|주상]]을 그리워한다."며 무정하게 떼어놓았다고 회고했다.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두 가지인데, 정조가 자신이 아닌 혜경궁을 선택하면 영조가 섭섭해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, 또한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죽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어린 시절 사도세자와 영조가 멀리 떨어져있어서 잘 만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영조와 사이가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. 그래서 정조를 영조의 마음을 잃게 하지 않기 위해 가까이 지내게 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